Public Sphere & Artistic In(ter)vention

서울에서의 하루

서울에서의 하루: '공공도큐멘트 00 Document’ 책 만들기에 부쳐

1. 뉴헤이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줄곧 ‘서울’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도시’는 내게 7년의 시간을 보낸 환경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 환경은 변하기 마련이고 그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노마드로서의 나의 불확실함을 기꺼워했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는 시도에는 꽤나 많은 것들이 얽혀있었다. 사적인 기억의 뉘앙스들을 낱낱히 펼쳐내는 것은 민망스러우니 건너뛰자. 생각하지않으려는 것들의 전제로서 기억이 머물러있다는 점은 한 ‘도시’가 어떻게 우리안에서 내재화되는것인가 하는 작은 질문을 던져준다. ‘도시’는 피상적인 환경으로서만 파편화되어버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억과 삶의 구조들이 연결되어서 결국 총체적인 경험의 합으로서 우리의 아이덴티티에 묶여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스펙타클성이 도시 곳곳에 침투해서 그 어느 곳하나 어디서나 재현되지 못할 것들이 없다하더라도 개개의 거리와 장소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되어서 고유성을 획득하곤 한다. 그 경계, 보편적 부름의 대상으로서의 장소와 커뮤니티의 내밀한 부름으로서의 장소성사이의 이 미묘하면서 흐릿한 경계들은 간혹 선명하지 않는 ‘집’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유발한다.#1 고유한 장소 자체로서 개별화된 ‘집’, 혹은 ‘고향’이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던 시대를 뒤로하고 매스프러덕팅의 신화가 오브젝트를 떠나서 장소 그 자체의 교환가치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시대에 우리에게 ‘집’과 ‘고향’은 사라져버린 사전의 단어지만 여전히 머물러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해주는 초혼의 대상이다.

2. 그 ‘도시’에 대한 잦은 망상들을 뒤로 하고 ‘도시’를 돌아본다. 메트로 폴리탄이니 뭐니를 떠나서 ‘사람’이 무리를 짓고 있는 공간으로서 자신의 ‘도시’를 돌아본다. 도시를 흐르는 강, 도시를 흐르는 교통수단. 이 두가지는 도시의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르도록 이른바 도시의 두가지 다른 종류의 혈액으로서, 이 단어가 부족하다면 생명의 원천으로서 작용해왔다. 도시는 이 두가지 같으면서도 다른, 자연이면서 인위적인 두가지 흐름이 만나서 탄생시키는 자식이다. 둘다 필요에 의한 산물이고 하나는 발견이라면 하나는 발명이라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3.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 어떻게 배분하느냐, 어떻게 이용하고 그 시스템속에서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의존해서 ‘도시’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재분배가 시작된다. 계급의 문제는 장소의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실 부의 재현으로서 건축과도 매우 긴밀한 연계성을 띄지만, 어쨌던. 도시로 유입되는 것들의 재분배는 도시계획따위가 없던때부터 비롯된것으로서 그 도시와 장소의 위계성은 기원이 오래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근대 모더니스트들의 이상적 도시의 꿈들이 도시계급화의 원형적 기원이라는 비판은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그 죄가 하늘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4. 원죄로서의 군집의 시작을 통탄하면서 우리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경계들과 새무리지음, 혹은 강요받은 게토이즘의 발현을 목격한다. 그래 ‘서울’은, 아니 그 ‘도시’들은 항상 결집하면서도 분화되어왔고 그 분화의 갈래의 갯수에 따라서 도시의 명성은 높아간다. 그 계단과 시스템이 복잡해질수록 그 계단을 밟아오르려는 이들의 욕망은 강화되고 합리적인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새로운 노동력의 유입이 일어난다. 자신의 신분을 고정하려는 이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도시 밖으로 ‘탈출’한다. 다음 단계에 대한 욕구를 잘 컨트롤하는 것은 도시의 질서를 보존하고 성립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권력의 일이다. 교외거주 Suburbia 의 신화가 이미 만개한 미국의 도시는 곧잘 도심공동화현상에 따른 할렘으로의 이양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진행되고 ‘센터’는 가끔 유령의 공간으로서 변한다.

5. 서울은 아직 다른 형태의, 분화가 덜된 도시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도시는 단지 기능만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들의 삶이 기능자체와 분화되지 못한채로 엮여질 수 밖에 없는, 달동네의 문제가 형태만 달라진채 그대로 상존하고 있다. 이것은 ‘메트로폴리탄’이 쳐해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도시속에 생계형 노동자만 남아서 그들의 공간을 힘겹게 끌어앉고 있지않다는 부분이다. 그것은 도시의 심각한 불균형과 함께 심리적 공항상태로 몰아간다. 사회시스템의 갈등을 감소시키려면 사실 방법은 간단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최소한 갈등상황으로까지 벌어지지 않는다. 물런 그런 재화의 현현은 사회적인 경쟁시스템을 유지하는 효과도 있긴하지만 그것이 공략불가능한 도시속의 도시로 변할때는 급속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 심리적인 게토화가 시작된다. ‘서울’은 그러한 계급갈등의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뉴욕의 탐욕이 진화한 도시중의 모범사례일것이다. 갈등이 장소를 통해서 명확히 자기를 제시해주는 드문 예중에 하나.

6. 이미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아이콘화가 되어 있는 강남과 강북의 신화들은 그러한 메트로폴리탄의 비극적인 분화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은 한강의 기적을 사이에 두고서 명백하게 갈려있는 도시이다. 이 책은 의도한 바 없음일지 모르나 그 맥락을 따라서 흐르고 있는 것으로 나에겐 비쳐진다. 이책의 공정에 일정부분 참여하면서 몇가지 시도한 것들은 이 책의 논의가 장소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활자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고민한 것들은 일단 뒤로 하고서 여기저기에 흝뿌려져있는 필자들의 지도들은 그들의 생활반경을 이야기한다. 장소성과 맥락이 더이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테크노마드의 미래적 비전이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장소는 우리를 선명하게 대변하는 대변자의 역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우리가 움직이는 곳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지도는 따라서 두가지 역활을 수행하려고 한다. 이 책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이 논의가 발현된 지점으로서의 두개의 ‘서울’에 대한 드러냄을, 그리고 이 책을 만든 사람들에게는 과연 우리의 논의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가만히 우리들의 경로를 들여다 보라. 우리는 어디서 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놀이가 어디로 확장되어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언급하고 있는가. 각각의 패턴들은 각자의 경로들을 반복시킨끝에 얻어진 것들이다. 이것들은 그 경로의 패턴들이 우리의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다.#2 그 패턴들과 경로들의 만남은 책의 여기 저기에서 약간은 소란스럽게 자기를 드러낸다. 그것은 책의 표지에서 던지는 두도시이야기의 확장된 버전으로 책 전체를 가로지른다. 책의 덮개는 그책의 모든 곳에서 다시금 발현되는 구조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고 있다. 두개의 도시는 그렇게 책을 가로지르고 논의하는 모든 것들에 그림자를 던져준다. 다양한 논의들이지만 어디서 그것들이 시작되는가. 모든 지도들은 정보의 총합으로서 답이 아니라 그 속성들의 현현이고 이 모든 것들의 묶음으로서 책은 그렇게 우리가 응답해야할 질문으로서 하나의 물상으로서 사람들의 손에 놓여졌으면 좋겠다.

글. 정진열(Jin Jung)
www.therewhe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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